Banana
I was born in Korea and immigrated to U.S. at the age of 11. Growing up in the U.S. as a typical 1.5 generation Korean American, I have gone through the cliché of the 1.5 generation identity crisis of asking myself “Who am I?” Growing up spending Junior High and High school years surrounded by few Korean Americans, I became an American all the while slowly forgetting the Korean language.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11살때 미국으로 이민을 왓읍니다. 나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의문을 가지고 몃몃 다른또래 1.5세 들과함께 성장하면서 미국인이 되가는 반면에 한국말을 차츰차츰 잊어 갔읍니다.
I had struggled with trying to be proficient in both English and Korean up until when I entered college. All the while I was getting more comfortable with the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I found myself alarmed at the rate at which I was forgetting Korean. It dawned on me that I was now more proficient in English than Korean when I found myself waking up from a dream mumbling something in English.
나는 대학입학 때까지 영어와 한국말을 둘다잘할수 잇기위해 고생햇읍니다. 영어실력이 차츰 늘면서 한국말은점차 줄엇읍니다. 그러던어느날, 나는 영어로 잠꼬대를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영어실력이 한국말보다 더 낞다는것을 깨달앗읍니다.
Feeling both proud of improving English and terrified of forgetting Korean, I had sought out my Korean friends in an effort to learn more Korean. This effort was a double edged sword in that now I was learning more Korean at the expense of losing my English proficiency.
나는 나의 영어실력이 늘어서 좋아하는 반면에 한국말이 주는것 때문에 당황햇읍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한국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 을 보내며 한국말을 더 배우려 안간힘을 썻읍니다. 이 노력때문에 한국말은 늘엇으나 반면에 영어 실력은 줄엇읍니다.
In college, this struggle had subsided due to the fact that I was too busy devoting myself to college life and the lack of any Koreans near me who spoke any decent Korean. Upon graduating from USC I found myself in the midst of ’93 recession which had dried up all jobs. The only job I was able to land was at Pacific Bell Korean Service Center where in which I was to service Korean customers in Korean! I was able to land a job because of the halfway decent Korean language skill that I had taken for granted.
대학입학후에는 내주변에 한국사람이 별로없고 대학생활이 바쁜탓에, 한국말 에 신경을 쓰지 못햇읍니다. USC 에서졸업한후에, ’93 공황탓에, 직장이 업엇읍니다. 그나마 얻을수가 있던 직장은 미국전화회사인 Pacific Bell 한인고객 센터 이엿읍니다. 나의 직책은 한국고객 상대로 한국말을 하는 직책이엿읍니다! 나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앗던 한국말을 할수잇엇기에 직장을 얻을수잇엇던 것입니다.
At this job in Pacific Bell where I spoke Korean to Korean people all day long, I was horrified and shocked at how much my Korean ability had deteriorated while I was at college. Customers were saying “I can’t understand this guy. I don’t think he speaks Korean well.” Through perseverance I had struggled at this job for a year and a half until I landed another job speaking Korean serving Korean people at a local kyopo bank. After working another 2 years at this kyopo bank struggling with Korean, I was proud to pat myself on the back and announce that I was now fluent in both English and Korean.
이 Pacific Bell 에서 한국인에게 한국말하면서 나는 내 한국말 실력이 얼마나 저하됫는지에대해 경악을 감추지 못햇읍니다. 고객들은 “이 사람말 못알아 듣겟어. 이 사람 한국말 잘 못하는것 같애.” 나는 고통을무릅쓰고 이 곳에서 1년반을 일햇읍니다. 그후로 나는 또하나의 한국고객상대로 한국말을 하는 교포은행에 입사하엿읍니다. 이 교포은행에서 추가 2년을 일한후에는 바야흐로 나는 이제는 영어와 한국말을 둘다 유창하게 구사할수있다 라는 자부심을 가질수 있게 되엇읍니다.
As far as the identity crisis goes, I have finally decided that I am an American. However, I don’t feel that I really belong with the white crowd. I am neither a white American nor a banana nor Korean. I am a Korean-American - an American with Korean roots which can never nor should be denied. There are many cultural concepts of Korean people that I detest. I was educated in America and I therefore think the way Americans do. I am very practical and straightforward. I do not care for the way Koreans try to dominate and exert influence over younger people who are smarter and more experienced than them just by the pure fact that they are older. I do not care for the way they cause harm and inconvenience to other people and then brush aside the victims’ objections and complaints.
“나는 누구인가?” 라는질문의 대한 결론은, 나는 미국인 이다 라고 낫읍니다. 하지만 나는 백인과 완전히 섞일수는없읍니다. 나는 백인도 아니고, 바나나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닙니다. 바나나 라고 하는 것은, 겉은 한국사람같이 노랏고, 속은 백인 같이 하얀 사람을 뜼합니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입니다. 즉, 한국에 뿌리를 가진 미국 사람 이라는 뜼입니다. 나는 미국에서 교육을받은 탓에 미국식 합리주의 사고방식을 가졌읍니다. 나는한국사람들이 나이가 더 어린사람이 더 경험이 많을때에도, 나이가 많지만 경험이 더없는 사람에게 꿀려야하는 사상이 싫습니다. 또 나는, 피의자가 피해자 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토가 싫습니다.
However disgusted and appalled I am at some of the behaviors and cultural concepts of Korean people, I am yet strangely drawn to the Motherland. I wish to be more exposed to the country and their lifestyle, their way of thinking if only to compare and contrast with my own views. I suppose this endeavor makes me to understand myself more and define myself and yes, “find myself.”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 대하여 더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한국식 사고방식을 싫어 하면서도, 한국을더 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혹시나 한국식 사고방식을 이해할수있을까 해서요.
I’ve had the opportunity to visit Seoul in 2000, 2003 and 2004. My first trip to Seoul in 2000 was 18 years after I had left the country. Although I spoke Korean fluently I felt a bit apprehensive on my first visit. I somehow had the notion that Korean spoken in Korea was somehow different than the Korean I spoke in the U.S.
나는 2000년, 2003년, 2004년 에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읍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발을 디딘건 한국을 떠난지 18년 후엿읍니다. 나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두려웟읍니다. 내생각 에는 혹시라도 미국에서 하는 한국말은 한국에서 하는 한국말과 다르지 않나하고 말입니다.
As it turned out I had very little to fear. To my amazement, people took me for a Korean and not a kyopo. I was traveling with a map book and people were coming up to me to ask for directions. Except for a few interesting and foreign customs I had encountered along the way, people accepted me as a Korean because I looked Korean spoke Korean well enough. I don’t think they would’ve suspected that I was a kyopo if I had not told them.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제가 한국사람인줄 알앗읍니다. 내가 한국사람같이 생겻고, 한국말을 충분히 하니까 한국사람들은 나를 한국사람으로 받아드렷읍니다. 만약에 내가 자진해서 내가 교포라교 안햇으면 아마도 몰랏을 것입니다.
I’m currently planning to move to Kangnam, S Korea and teach English there so that I may understand Korean culture better.
나는 현재 강남, 한국으로 이사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을 더욱더 이해하려 합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11살때 미국으로 이민을 왓읍니다. 나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의문을 가지고 몃몃 다른또래 1.5세 들과함께 성장하면서 미국인이 되가는 반면에 한국말을 차츰차츰 잊어 갔읍니다.
I had struggled with trying to be proficient in both English and Korean up until when I entered college. All the while I was getting more comfortable with the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I found myself alarmed at the rate at which I was forgetting Korean. It dawned on me that I was now more proficient in English than Korean when I found myself waking up from a dream mumbling something in English.
나는 대학입학 때까지 영어와 한국말을 둘다잘할수 잇기위해 고생햇읍니다. 영어실력이 차츰 늘면서 한국말은점차 줄엇읍니다. 그러던어느날, 나는 영어로 잠꼬대를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영어실력이 한국말보다 더 낞다는것을 깨달앗읍니다.
Feeling both proud of improving English and terrified of forgetting Korean, I had sought out my Korean friends in an effort to learn more Korean. This effort was a double edged sword in that now I was learning more Korean at the expense of losing my English proficiency.
나는 나의 영어실력이 늘어서 좋아하는 반면에 한국말이 주는것 때문에 당황햇읍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한국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 을 보내며 한국말을 더 배우려 안간힘을 썻읍니다. 이 노력때문에 한국말은 늘엇으나 반면에 영어 실력은 줄엇읍니다.
In college, this struggle had subsided due to the fact that I was too busy devoting myself to college life and the lack of any Koreans near me who spoke any decent Korean. Upon graduating from USC I found myself in the midst of ’93 recession which had dried up all jobs. The only job I was able to land was at Pacific Bell Korean Service Center where in which I was to service Korean customers in Korean! I was able to land a job because of the halfway decent Korean language skill that I had taken for granted.
대학입학후에는 내주변에 한국사람이 별로없고 대학생활이 바쁜탓에, 한국말 에 신경을 쓰지 못햇읍니다. USC 에서졸업한후에, ’93 공황탓에, 직장이 업엇읍니다. 그나마 얻을수가 있던 직장은 미국전화회사인 Pacific Bell 한인고객 센터 이엿읍니다. 나의 직책은 한국고객 상대로 한국말을 하는 직책이엿읍니다! 나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앗던 한국말을 할수잇엇기에 직장을 얻을수잇엇던 것입니다.
At this job in Pacific Bell where I spoke Korean to Korean people all day long, I was horrified and shocked at how much my Korean ability had deteriorated while I was at college. Customers were saying “I can’t understand this guy. I don’t think he speaks Korean well.” Through perseverance I had struggled at this job for a year and a half until I landed another job speaking Korean serving Korean people at a local kyopo bank. After working another 2 years at this kyopo bank struggling with Korean, I was proud to pat myself on the back and announce that I was now fluent in both English and Korean.
이 Pacific Bell 에서 한국인에게 한국말하면서 나는 내 한국말 실력이 얼마나 저하됫는지에대해 경악을 감추지 못햇읍니다. 고객들은 “이 사람말 못알아 듣겟어. 이 사람 한국말 잘 못하는것 같애.” 나는 고통을무릅쓰고 이 곳에서 1년반을 일햇읍니다. 그후로 나는 또하나의 한국고객상대로 한국말을 하는 교포은행에 입사하엿읍니다. 이 교포은행에서 추가 2년을 일한후에는 바야흐로 나는 이제는 영어와 한국말을 둘다 유창하게 구사할수있다 라는 자부심을 가질수 있게 되엇읍니다.
As far as the identity crisis goes, I have finally decided that I am an American. However, I don’t feel that I really belong with the white crowd. I am neither a white American nor a banana nor Korean. I am a Korean-American - an American with Korean roots which can never nor should be denied. There are many cultural concepts of Korean people that I detest. I was educated in America and I therefore think the way Americans do. I am very practical and straightforward. I do not care for the way Koreans try to dominate and exert influence over younger people who are smarter and more experienced than them just by the pure fact that they are older. I do not care for the way they cause harm and inconvenience to other people and then brush aside the victims’ objections and complaints.
“나는 누구인가?” 라는질문의 대한 결론은, 나는 미국인 이다 라고 낫읍니다. 하지만 나는 백인과 완전히 섞일수는없읍니다. 나는 백인도 아니고, 바나나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닙니다. 바나나 라고 하는 것은, 겉은 한국사람같이 노랏고, 속은 백인 같이 하얀 사람을 뜼합니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입니다. 즉, 한국에 뿌리를 가진 미국 사람 이라는 뜼입니다. 나는 미국에서 교육을받은 탓에 미국식 합리주의 사고방식을 가졌읍니다. 나는한국사람들이 나이가 더 어린사람이 더 경험이 많을때에도, 나이가 많지만 경험이 더없는 사람에게 꿀려야하는 사상이 싫습니다. 또 나는, 피의자가 피해자 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토가 싫습니다.
However disgusted and appalled I am at some of the behaviors and cultural concepts of Korean people, I am yet strangely drawn to the Motherland. I wish to be more exposed to the country and their lifestyle, their way of thinking if only to compare and contrast with my own views. I suppose this endeavor makes me to understand myself more and define myself and yes, “find myself.”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 대하여 더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한국식 사고방식을 싫어 하면서도, 한국을더 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혹시나 한국식 사고방식을 이해할수있을까 해서요.
I’ve had the opportunity to visit Seoul in 2000, 2003 and 2004. My first trip to Seoul in 2000 was 18 years after I had left the country. Although I spoke Korean fluently I felt a bit apprehensive on my first visit. I somehow had the notion that Korean spoken in Korea was somehow different than the Korean I spoke in the U.S.
나는 2000년, 2003년, 2004년 에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읍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발을 디딘건 한국을 떠난지 18년 후엿읍니다. 나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두려웟읍니다. 내생각 에는 혹시라도 미국에서 하는 한국말은 한국에서 하는 한국말과 다르지 않나하고 말입니다.
As it turned out I had very little to fear. To my amazement, people took me for a Korean and not a kyopo. I was traveling with a map book and people were coming up to me to ask for directions. Except for a few interesting and foreign customs I had encountered along the way, people accepted me as a Korean because I looked Korean spoke Korean well enough. I don’t think they would’ve suspected that I was a kyopo if I had not told them.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제가 한국사람인줄 알앗읍니다. 내가 한국사람같이 생겻고, 한국말을 충분히 하니까 한국사람들은 나를 한국사람으로 받아드렷읍니다. 만약에 내가 자진해서 내가 교포라교 안햇으면 아마도 몰랏을 것입니다.
I’m currently planning to move to Kangnam, S Korea and teach English there so that I may understand Korean culture better.
나는 현재 강남, 한국으로 이사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을 더욱더 이해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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